메이커 읽을거리

[메이커로 살기] 글자의 온기를 새기다, 인쇄소 긷 최민영 대표
등록일 : 2019-11-04 10:30:57 조회수 : 121

 

글자의 온기를 새기다

인쇄소 긷 최민영 대표

 

 

글 이락희

사진 봉재석

 

 

 

 

서울 종로구 원서동 긴 골목의 끝자락에 자리잡은 인쇄소 긷. 아담한 한옥을 개조해 만든 사무실 안에는 100년쯤 되었다는 활판인쇄기와 최신형 컴퓨터가 나란히 놓여 있다. 간판 이름대로라면 인쇄하는 공간일 테지만 잉크 냄새는 물론이고 인쇄소 특유의 분주함이나 기계 돌아가는 소음은 없다. 댓돌 위에서 타고 있는 모기향 재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하다. 작업실의 주인장은 무엇을 만드는 사람일까보다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만드는 사람인지가 궁금해진다. 올해 6월에 인쇄소 긷을 오픈했다는 최민영 대표를 만났다.

 

 

# 인쇄소 긷은 어떤 공간입니까?

 

 

 

 

저는 한국적 미감을 잃지 않고 지켜나가고 싶은 사람입니다. 이곳은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 미감을 표현하고 싶어 만든 공간입니다. 활판인쇄도 그런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명함, 청첩장, 도록 등 종이로 인쇄할 수 있는 모든 제작물을 만들고 있습니다. ‘가장 잘 할 수 있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인쇄기술, 사진작업기술 등 내가 가진 기술들로 좀 더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고 있습니다.

 

 

# 요즘 사람들은 활판인쇄를 잘 모를 텐데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요?

 

 

 

 

 

사실, 활판인쇄에 대한 관심보다는 한지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야 할 것 같아요. 이전에 근무하던 곳에서 한지의 매력을 알게 되었는데 어떻게 표현해야 한지를 가장 한지답게 표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활판인쇄라는 방법을 찾게 되었어요.

 

 

 

 

 

# 활판인쇄란 어떤 인쇄를 말하는 것인가요?

 

활판인쇄란 인쇄할 틀에 글자 하나하나를 찾아 넣은 후 주물로 활판을 떠서 인쇄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즘의 디지털 인쇄처럼 종이 위에 잉크를 뿌려서 인쇄하는 방식이 아니라 양각된 활판에 잉크를 묻힌 후 꾹 눌러 인쇄를 하기 때문에 새긴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인쇄방식입니다. 한지에 인쇄하면 글자 한 자 한 자마다 독특한 요철의 질감이 느껴집니다.

활판인쇄가 90년대까지만 해도 많이 쓰이던 인쇄방식이었는데 컴퓨터가 나오고 인쇄공정이 자동화되면서 너무 갑자기 사라져버렸어요. 인쇄공정이 워낙 빨리 변해버렸기 때문에 기억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 작업공간도 예사롭지 않고 활판인쇄라는 분야에 뛰어든 것도 평범해 보이지 않는데 이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물나무라는 곳에서 8~9년 정도 근무했어요. 사진관, 다방, 갤러리, 공예품 판매 등 다양한 사업을 하는 공간인데 현재는 흑백사진관으로 더 유명한 곳입니다. 흑백필름으로 사진을 찍고 옛날 방식으로 인화하는 곳인데 저는 그곳에 디자이너로 입사해 디자이너로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했습니다. 전공이 사진이라 필름현상과 인화, 사진 후반작업 등도 했어요.

 

 

# 한지에 활판인쇄를 하면 한지의 아름다움이 드러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걸 내가 직접 해보겠다고 인쇄소를 여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잖아요. 인쇄소 긷을 열고 독립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나라에 한지가 있듯이 일본에도 와지라는 전통종이가 있습니다. 와지는 전통의 끊김 없이 오히려 현대의 쓰임새에 맞게 꾸준히 발전해 왔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한지가 명맥을 이어오고는 있지만 현대사회에 대단히 쓸모 있게 쓰이는 형편은 못됩니다. 인쇄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종이가 되었어요.

활판인쇄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오래전부터 사용했던 인쇄방식인데 너무 갑자기 사라져버리다시피 했어요. 지금은 빨리빨리 만들어내야 한다는 시대적 흐름을 쫓느라 눈치 채지 못하다가 어느날 돌아보면 완전히 사라져있다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물나무 대표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나라도 작게나마 이런 전통기법의 인쇄방법을 이어가고 있으면 어디선가 또 나 같은 어린 친구가 나타나 나의 일을 이어서 해줄 것이다. 이런 일들이 이어진다면 나중에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도 남아있게 된다. 그때가 되면 지금보다 훨씬 더 발전된 방법으로 전통방식의 활판인쇄가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어요. 그런 작은 역할을 해보고 싶어서 인쇄소를 시작했습니다.

 

 

# 그래도 활판인쇄의 불모지에 뛰어든 것 같아 무모해 보이기도 해요. 돈을 벌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일 같지도 않아요. 오픈 초인데 지금 상황이 어떠신지요.

 

분명히 돈을 벌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일입니다. 저는 이곳이 번창해서 돈을 벌고 싶어요. 아니 돈을 벌 겁니다. 이제 5개월째 접어들었는데 처음에는 뭐든지 혼자서 다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두렵기도 했지만 이제 두려운 단계는 극복한 것 같아요. 오히려 내가 얼마나 깊게 생각하고 결정한 것이냐의 차이에 따라 그 결과가 고스란히 느껴지니까 재미있어요.

 

 

# 디지털 인쇄가 보편화되었고 그 속에서마저 속도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활판인쇄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전통을 잇고 싶다는 욕심이 크기 때문에 활판인쇄를 고집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저는 활판인쇄만 고집하는 것은 아닙니다. 디지털인쇄와 활판인쇄의 장점이 상호작용하면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활판인쇄는 구식이라 사라져야 한다는 인식에 제동을 걸고 싶어요.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이 아니라 활판인쇄 방식도 다양한 인쇄방식의 일부가 되기를 바라고 있어요.

예를 들면 도록작업을 할 때도 표지와 내지 모두 활판인쇄로 가는 건 비용이나 작업기간 등을 생각하면 어려운 일입니다. 임팩트를 줄 수 있는 부분에 활판인쇄를 활용하고 내지는 디지털인쇄를 하는 방식으로 서로의 장점을 활용하는 겁니다.

 

 

# 사람의 손길과 정성이 들어가서 만들어지는 것들이 지니는 가치가 있는 것 같아요. 활판인쇄도 이런 측면이 있는 것 같은데 대표님이 생각하는 활판인쇄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두루뭉실한 대답 같지만 팩트입니다. 실제로 예전에 활판인쇄로 만들어진 책들을 보세요. 잉크로 꾹 눌러서 찍어낸 책들은 아직도 활자에 묻은 잉크가 벗겨진 경우가 매우 드물어요.

 

 

# 이름과 로고가 아주 독특한데 어떤 의미가 담겨있나요?

 

 

 

 

긷은 기둥의 옛말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의미를 담기 위해 글자를 찾은 것은 아닙니다. 평소에 내가 작업실을 만들게 되면 어떤 이름을 붙일까를 한참 고민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 무의식적으로 입에서 계속 맴돌던 소리가 ‘git’로 표현되는 소리였어요. 이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글자를 찾다가 을 알게 되었어요. 든든한 느낌이 들잖아요.

로고는 여러 개의 기둥이 겹쳐진 단면을 표현한 것입니다. 각각의 기둥들은 내가 이 공간에서 하고 있는 작업들을 의미하고 있어요. 활판인쇄로 시작했지만 앞으로 리소인쇄도 하고 싶고 컬러필름 현상, 흑백필름 인화작업도 할 것입니다. 이런 다양한 작업들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로고를 만들었어요.

 

 

# 공간의 이름이 인쇄소라 인쇄만 고집스럽게 하는 집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인쇄소 긷에서 인쇄소는 한자로 印刷所가 아니고 仁刷所입니다. 찍을 이 아니라 어질 인()을 썼어요. 어떤 책에서 한국인의 성품을 표현하는 한자를 하나만 꼽으라면 어질 인()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어떤 방법이 되었건 한국적 미감을 표현하는 공간이 되고 싶다는 의지를 담고 싶었어요.

작업공간이 통유리라 골목길을 오고가는 사람들과 가끔 눈이 마주치기도 해요. 이 골목과 어울리지 않는 기계들이 들어앉아 있으니 호기심을 보이기도 합니다만 들어와서 구경해도 좋다고 눈빛을 보내도 아직은 선뜻 들어오지 못하네요.

 

 

# 기계 얘기가 나왔으니 작업실의 활판인쇄기는 희귀템인데 어떻게 구했습니까?

 

 

 

 

활판인쇄기를 구하려고 여러 곳에 수소문을 했다가 어느 앤티크숍에서 우연히 발견했어요. 100년 정도 된 기계라고 하는데 돌려보니 기계가 움직이더라고요. 열심히 기름칠을 해서 지금은 잘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열심히 활판인쇄를 하고 있어요.

 

 

한국적 미감을 살린 지질과 디자인으로 뭔가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에 인쇄소 긷의 활동도 메이커 활동의 일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궁극적으로 인쇄소 긷을 통해 무엇을 만들고 싶습니까?

 

사실 나의 활동은 무엇을 만들고 싶다기보다는 어떻게 만들고 싶다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무엇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내느냐가 나의 관심사입니다. 활판인쇄 방식으로 한지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 우선의 목표이고 앞으로도 한국의 미감을 살릴 수 있는 다양한 표현방식을 개발해 나가고 싶어요. 꾸준히 초심 잃지 않고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 나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