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커 읽을거리

[메이커이슈] “여성을 위해 계속해보겠습니다”
‘걸스로봇’ 이진주 대표
등록일 : 2018-09-18 14:02:51 조회수 : 1,453

어지간한 물건은 직접 만들어 쓰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자랐다는 ‘걸스로봇’의 이진주 대표. 그는 여성과 성 소수자 공학도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사업을 통해 로봇을 만드는 ‘여성 메이커’를 만날 기회가 많았다. 아직도 사회 곳곳에는 남녀 성별을 구별하고 능력을 확인하기도 전에 차별하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그는 국내외 메이커페어에서 만난 가족 메이커들을 통해, 여성 메이커의 밝은 미래를 발견한다.



2015년 11월 창립한 소셜벤처 네트워크 ‘걸스로봇(Girls Robot)’의 이진주 대표.



오만과 편견

‘걸스로봇’을 만들고 활동하기 시작한 지 삼 년째다. 로봇계에 듬성듬성 존재하는 ‘여교수’, ‘여학생’들을 모아 컨퍼런스를 열고, 파티와 밋업(Meet Up, 취미·취향 등에 기반한 개방적이고 참여도가 높은 서구식 모임), 멘토링 등을 제공하며, 나 자신도 여대생을 대상으로 지역과 크기를 가리지 않고 강연들을 해왔다. 많게는 300~400명, 보통은 100~200명씩, 수천 명의 이공계 여학생들을 만났다.
강연을 마치면 수많은 질문들이 나온다. “로봇계에서 여학생은 어떤 의미일까요? 밥은 같이 먹고 싶지만, 조원으로서는 부담스런 존재? 연애는 하고 싶어도, 일은 같이 하기 싫은 존재?” 고등학생일 때부터 로봇 메이커 활동을 했던 한 컴퓨터공학과 친구의 질문이었다. “우리가 바디를 만들게. 너는 코딩이나 해.” 하드웨어는 남성의 것, 소프트웨어는 여성의 것이라는 편견, 바디를 만드는 건 어렵고, 코딩은 쉬운 일이라는 오만이 동시에 작동한 말이었다.




현재 15% 내외인 이공계 여성 비율을 20%, 30%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걸스로봇의 비전이다 (출처: 걸스로봇)



많은 이들이 좋은 뜻에서, 특히 여학생들을 격려한다는 의미로 자주 쓰고는 있지만, 실은 “여자라서 부드럽다”, “여자라서 섬세하다”는 표현조차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개체의 속성이지, 성의 속성이 아니다. 여자라서 또는 남자라서 더 잘할 수 있는 분야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젠더리스 세대의 아이들

최근 들어 강연을 마치고 나면, 본인의 성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과 취향을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하는 친구들이 100명 중 하나 꼴로 등장한다. 말하는 이가 1퍼센트다. 말하지 않는 이는 훨씬 더 많다는 뜻이다. 다음 세대의 아이들은 ‘젠더리스’, ‘젠더 플루이드(고정된 성별이 아니라 때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의 시대를 산다. 이런 첨단의 아이들의 성별을 구분하고 “남자라서”, “여자라서” 어떻다고 말하는 건 대단히 시대착오적인 일이다. 하지만 세상은 천천히 변하고, 나는 3년째 다양한 세대, 여러 계층의 여성들로부터 비슷한 질문을 받고 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세상이 급변한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같은 시대, 다양한 세대, 여러 층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는 혁명 같은 것.
얼마 전, 강연을 마치고 나니 모 자동차 회사를 퇴사했다는 여성 연구원이 찾아왔다. 그는 내게 “앞장서 이런 일을 해주어 고맙다”고 인사하며, 최근 초등학생인 딸이 로봇교실에서 겪은 일을 들려주었다. “로봇교실에 여자아이가 하나밖에 없어요. 엄마들이 무슨 여자애한테 로봇을 시키냐며 자꾸 뭐라고 하고, 남자애들도 계속 흘끔거리고, 아이도 같이 할 친구가 없으니 위축되는 것 같아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축구를 하는 여자아이도 ‘우리 운동장에서 나가라’는 이야기를 듣는대요. 그래도 당연히 계속 시키실 거죠?” “그럼요, 계속 해야죠.”




걸스로봇 이미지 (출처: 걸스로봇)



두어 해 전, 한 중동 지역 여학생들이 히잡을 쓰고 교육용 로봇 대회에 출전해 특별상을 수상했던 기억이 났다. 전쟁 중이라 로봇 키트와 부품을 공수하는 데 몇 개월이 걸려 실제로는 채 며칠 작업하지 못하고 대회에 나섰다고 했다. 대회장인 미국에 오기 직전까지 비자 문제로 여러 번 고통을 겪기도 했단다.
그들의 이야기가 내외신을 통해 알려지면서 엄청난 격려와 박수를 받았다.



가족 메이커에게 배우는 ‘메이커 정신’

다행히 우리나라는 전쟁도 없고, 비자 문제도 없다. 그런데도 지금 여기에서 로봇하는 여자 아이들, 또는 여자 어른들은 번번이 좌절을 겪는다. 전쟁과 비자 때문이 아니라 편견 때문이다. 삼십 년 전과 다를 바 없는 현실에 안타까움과 좌절감을 넘어 때로 분노를 느끼다가도 매년 세계 각지에서 열리는 ‘메이커페어’에서는 희망을 찾게 된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아빠 메이커, 엄마 메이커가 인도하는 가족 단위가 많다는 점이다. 그 딸들은 아빠, 엄마의 격려를 받고, 아두이노 같은 간단한 툴을 사용하는 것부터 복잡한 코딩이 들어가는 것까지 다양한 작품들을 들고 나온다.




해외 메이커페어에서 만난 가족 메이커 (출처: 걸스로봇)



걸스로봇 1기 펠로우이자 메이커인 이세리 씨가 서울 메이커페어에서 인터뷰했던 강태욱 씨 가족도 그런 사례 중 하나였다. 선우, 연수라는 두 딸이 아버지 메이커를 따라 나온 것. 딸들은 하드웨어부터 소프트웨어까지 가리지 않고 만진다. 아빠에게서부터 언니에게로 또 여동생에게로, 주위의 어려운 문제를 발견하고 직접 해결하려는 메이커로서의 훈련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가족 메이커들은 ‘여자와 메이커 문화’에 대한 장벽과 편견을 없앤다. STEM(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and Mathematics) 전 분야에서 그렇듯 메이커페어에도 여성 참가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누구도 “여자라서 출품작이 부실하거나 허술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처음이어서 서툴 수는 있다. 초보자는 누구나 허술하다. 하지만 아두이노든 애플이든 메이커들은 매끈하고 완벽한 ‘완성태’가 아니라 언제든 발전과 향상이 가능한 ‘가능태’로 존재한다. 그들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메이커는 서로가 서로를 존중한다.



가족 메이커들은 여자와 메이커 문화에 대한 장벽과 편견을 없앤다 (이미지 사진)



바비 인형 대신 쥐어준 작은 톱

헬렌 그라이너(세계 최초의 청소로봇 ‘룸바’ 개발사
아이로봇 CEO)와 신시아 브리질(MIT 교수, 소셜로봇 ‘지보’ 창시자) 등 걸출한 여성 로봇공학자들을 키워낸 로봇계의 구루이자 ‘리싱크 로보틱스’의 회장인 로드니 브룩스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걸스로봇을 소개했는데, 그는 “정말 의미 있는 일을 한다”고 격려하며 휴대폰을 꺼내 홈페이지 하나를 직접 열어 보여주었다. 그의 딸 앨리스 브룩스가 운영하는 장난감 회사 ‘메이카(Maykah)’였다.

그의 딸도 걸스로봇과 똑같은 문제의식을 느끼고 여자아이들을 위한 블록형 놀이기구 ‘루미네이트(Roominate)’를 개발했다는 거다. 레고, 아이패드와 호환되는 집짓기 세트다.
걸스로봇이 STEM 분야에 더 많은 소녀들을 끌어들이고 살아남게 만드는 캠페인과 파티, 밋업을 여는 ‘운동’을 해왔다면, 그의 딸은 성공한 교수이자 사업가인 아버지를 따라 본격적인 ‘사업’을 하고 있다. 앨리스 브룩스는 회고했다.

“어릴 때 바비 인형을 사달라고 했더니, 아빠가 작은 톱을 쥐어 주시더라고요. 그런 제가 자라서 스탠포드, MIT 학위를 가진 엔지니어가 됐고, 저 같은 소녀들을 위한 장난감을 만든 거죠.” 




여자아이들을 위한 블록형 놀이기구 ‘루미네이트’ (출처: Maykah)



메이커 아버지 밑에서 자란다는 것

실은 나 역시 요즘 말로 메이커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기계공학과를 나와 계측기 사업을 했고, 어지간한 물건들은 직접 만드는 분이었다. 우리 삼남매들도 덩달아 글라이더부터 과학상자까지 거의 모든 종류의 과학대회를 섭렵했다. 나는 여자였지만 연장자인 누나이자, 아빠의 총애를 받는 ‘꿀딸’이었고, 학교를 지배하는 모범생이었기에, 남동생들은
여자가 무엇을 하는 것’ 또는 ‘심지어 압도적으로 잘하는 것에 대한 의심을 단 한 점도 가질 수 없었다. 우리는 금속이라는 일상적이지 않은 재질, 나사와 같은 작고 정밀한 부품, 세심한 설계도의 구현과 총화로서의 기계 같은 것들에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노출됐다. 잘 아는 것을 사랑하기는 쉬워도 미워하기는 어려웠다.

걸스로봇의 첫 런칭파티에는 그 전에 열렸던 여느 로봇 밋업과 다른 점이 있었다. 다섯 명의 초청 연사가 모두 여성이었고, 여성 참석자들도 40%에 달했다는 점이었다. 그 중 이과 딸들을 데려온 아빠들이 있었다. ‘걸스로봇-조경현 주니어 펠로우’ 곽필주 씨도 그 중 하나였다. 3년 전 고등학교 로봇 동아리의 일원이었던 그 친구는 미국 카네기멜론대학과 조지아텍에 모두 합격한 로봇걸로 성장했다. 그리고 USC의 경영대학을 선택해 유학을 떠났다. 아버지 곽지훈 씨는 SK에서 로봇을 만들고 있다. 두 딸을 데리고 로봇계의 주요 행사를 섭렵하는 열정적인 아버지이기도 하다. 아무도 그의 딸들에게 ‘여자라서 못 한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해외 로봇 대회에선 소녀 단일팀이 심심찮게 보인다 (출처: 걸스로봇)



특히 해외에서는 교육용 로봇 대회에 나선 ‘소녀 단일팀’이 심심찮게 보인다. 보라색이나 핑크색 티셔츠를 입고, 발레복인 튀튀를 걸치고, 머리를 땋거나 틀어올리고, 롱부츠를 신는 등 자신들의 ‘여성성’을 부끄러워하거나 숨기지 않고 한껏 즐긴다. 그러면서도 남성적이라고 알려진 로봇을 잘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한다. 지도교사가 여성인 올 피메일(All Female) 팀도 흔하다. 나는 사비를 들여 국내외를 오가며 미래를 조금 먼저 보았고, 그걸 전하는 일을 하고 있다. 시장은 여기에 있다. 메이커 아빠와 코딩하는 엄마의 주머니 속에, 딸들의 미래를 걱정하고 인도하는 그 마음속에.

자, 이제 당신의 딸을 어딘가에서 쫓아내려는 이들을 만나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사실 알고 보면, 최초의 메이커는 여성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임 유어 마더.”




글. 이진주(걸스로봇 대표)